“우리는 우리가 다시 날 수 있을거라 믿습니다(We believe we can fly agian).”
27일 오후 3시 30분쯤 인천국제공항. 노란색과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입국장으로 들어오는 청년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한데 모여 “파이팅”을 외친 뒤 인솔자의 안내에 따라 전주시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우여곡절 끝에 이날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이들은 우크라이나 청년들로 구성된 ‘므리야(Mriya) 댄스팀’이다.
므리야 댄스팀은 올해 초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2월 말부터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수도 키이우엔 미사일과 포탄이 쏟아졌다. 인근 호스토멜 공항도 미사일 세례를 피하지 못했다. 당시 공항엔 항공기 ‘므리야’가 엔진을 정비하고 있었다. 므리야는 1980년대 구소련이 우주선을 수송하기 위해 만든 현존하는 가장 큰 비행기였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자랑거리였던 므리야는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굉음과 함께 바스러졌다.
‘므리야’에 감정 이입한 우크라 피난민
므리야의 ‘부고’는 피난을 떠난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므리야가 우크라이나어로 ‘꿈’을 뜻하는 단어인 것처럼 우크라이나 국민의 꿈이 무너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로 피난 온 대학생 베로니카(23)는 “나는 여기서 독일어를 못하는 이국 여성에 불과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므리야처럼 내 꿈도 사라질 것 같아 두렵다”라고 말했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한국계 독일인 조슈아 리(51)가 손을 내밀었다. 독일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그는 지난 4월 난민을 돕는 자원봉사자 10여명과 함께 비영리 법인단체 ‘이히 할테 디히(Ich halte dich)’를 만들었다. ‘우리가 당신을 붙들어줄게요’라는 뜻이다. 전쟁통에 꿈을 잃어가는 우크라이나 청년에게 꿈을 되찾아주겠다는 각오였다. 독일 곳곳에서 우크라이나 청년 40여명이 모이면서 ‘므리야 프로젝트’가 닻을 올렸다. 각자의 꿈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한 우크라이나 대학생이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문화 댄스페스티벌(댄스 페스티벌)에 참가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고국에서 열린 한국문화 행사에 참여하면서 댄스 페스티벌을 알게 됐다고 한다. “국제무대에서 우크라이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목표와 함께 므리야 댄스팀이 탄생했다.
여권·비행기값 문제 넘어 한국행 성사
연습실에서 합을 맞추고 거리행사에서 구슬땀을 흘리길 두 달. 어느새 실력이 붙었다. 하지만 벽에 부닥쳤다. 학생 상당수가 여권이 없었는데 전쟁 이후 재독 우크라이나 영사관은 더는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키이우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고민이 될법했지만, 청년들은 주저하지 않고 키이우로 향했다. 천신만고 끝에 여권을 발급받아 돌아오는 길, 국경수비대는 “반드시 1등을 해서 조국이 살아 있단 걸 알려달라”면서 웃어 보였다고 한다.
이번엔 항공권 가격이 발목을 잡았다. 전쟁으로 인한 유가폭등으로 한국행 비행기표 값은 평상시보다 2배 이상으로 올라있었다. 므리야팀 40명을 한국으로 보내기 위해선 5만 유로가 필요했다. 출발 2주 전까지 모은 돈은 2만 유로에 불과했다. 대금 지급 마감일을 앞두고 발만 동동 구르던 그들에게 ‘기적’이 펼쳐졌다. 후원금이 갑작스레 쏟아진 것이다. 가까스로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쥐던 날 댄스팀 모두는 감격에 겨워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댄스팀을 지원하는 진병준(49)씨는 “독일 곳곳에서 거리행사를 할 때마다 많은 사람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며 “부지런히 댄스팀의 취지를 알린 게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페스티벌에서 선보일 고국의 애환
므리야 댄스팀은 이번 달 30일 전주에서 열리는 댄스페스티벌 무대에 선다. 우크라이나 전통의상을 입고 3막에 걸쳐 고국의 전통춤을 선보일 예정이다. 평화로운 고국의 모습에서 시작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멈춰선 시간과 아픔, 그리고 평화를 되찾은 고국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번 공연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의 혼이 여전히 깨어있다는 걸 기억하고 응원했으면 하는 게 댄스팀의 간절한 소망이다. 27일 낯선 이국에 선 댄스팀 리더 로만의 목소리엔 힘이 가득했다. “비록 므리야는 파괴됐지만, 우리의 므리야(꿈)는 끝나지 않았어요. 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거에요. 지켜봐 주세요.”
안토노프 AN-225 ‘므리야(Mriya)’
므리야는 과거 소련의 우주선 부란(Buran)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초대형 수송기다. 큰 우주선을 옮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당국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과거 므리야를 제작, 관리했던 회사가 우크라이나에 있었던 덕분에 소련 붕괴 이후에 우크라이나가 므리야를 운용하게 됐다. 우크라이나어로 ‘꿈’을 뜻하는 므리야는 국가 행사 때만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우크라이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약 285t인 므리야는 비싼 유류비 탓에 1년에 몇 번 날지 않는다고 한다. 2010년 이후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했다고 한다. 지난 2월 러시아 공격을 받기 전 므리야는 키이우 인근 호스토멜 공항에서 엔진 정비 중이었다. 다른 항공기는 피신했지만 므리야는 포격을 피하지 못하고 파괴됐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트위터를 통해 므리야의 파괴 소식을 전하면서 “러시아가 비행기는 부술 수 있어도, 우리의 꿈은 부수지 못한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국영 방산업체 우크로보론프롬사는 므리야를 복원하겠다고 밝히면서 “5년간 약 3조6200억 원이 투입된다. 우리 과제는 우크라이나 항공과 화물에 고의적 피해를 준 러시아가 비용을 내는 것”이라고 전했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출처 : 기적처럼 비행기 티켓 쥐었다…한국 온 우크라 ‘므리야’ 댄스팀 | 중앙일보 (joongang.co.kr)